「배따라기」는 1921년 『창조』 9호에 발표한 김동인의 단편소설이다.
전설에서 소재를 따온 작품으로 운명적인 삶의 행로를 낭만주의 수법으로 그려내었다.
곡절없는 삶이 없겠지만, 조그만 어촌 마을에 살던 우애가 깊은 두 형제에게 일어난 이야기다.
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형은 20년이 넘게 배따라기 노래를 부르며 이리저리 아우를 찾아 떠돌게 된 것일까?
1918년 도쿄 유학 시절의 김동인
1918년 도쿄 유학 시절의 김동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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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동인이 ‘본격 단편 소설’이라고 자신 있게 내놓은 「배따라기」는 운명적인 삶의 행로를 낭만주의 수법으로 그려낸 점에서 초기의 「약한 자의 슬픔」이나 「마음이 옅은 자여」와 같은 궤도에 놓을 수 있다. 다만 이 작품은 구성이 치밀하고 줄거리가 복합 구조 속에 녹아들어 초기 작품에 비하면 단편 소설로서의 완결성이 한결 돋보인다.
『창조』는 「배따라기」가 실린 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며
김동인(1900~1951)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이자 현대 소설의 지평을 연 작가이다. 1919년 동인지 『창조』를 내고 여기에 단편 「약한 자의 슬픔」 · 「마음이 여튼 자여」 · 「피아노의 울림」 등을 선보인 김동인은 1921년에도 『창조』 9호에 단편 「배따라기」를 비롯해 「목숨」 · 「연산군」 · 「전제자」 · 「딸의 업(業)을 이으리」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.
1930년에 들어 김동인은 파산과 부인의 가출로 인한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「죄와 벌」 · 「배회」 · 「증거」 · 「순정」 · 「구두」 · 「포플러」 · 「신앙으로」와 예술가의 생애를 탐미적으로 그린 「광염(狂炎) 소나타」 · 「광화사」 등을 잇달아 내놓는다.
“소설가는 인생의 회화(繪畵)는 될지언정 그 범위를 넘어서서는 안 되는 것이며 될 수도 없는 것이다.”라고 객관적이면서도 독자성에 입각한 작가론을 펼쳤다. 일생동안 공백기 없이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.